원가행(怨歌行)

'원망의 노래'라는 뜻으로 한 여름에 주목을 받던 부채가 가을이 되니 버려진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미색이 아름다울 때는 황제의 총애를 받다가 세월과 함께 아름다움을 잃게 되어 황제의 사랑을 잃게 됨을 걱정했다. 이 시에 나오는 추풍선(秋風扇)이라는 말은 쓸모가 없어진 물건이나 총애를 잃은 여자의 비유로 많이 쓰인다.

新裂齊紈素(신열제환소)

새로이 잘라낸 제(齊)나라의 흰 비단

皎潔如霜雪(교결여상설)

깨끗하고 하얀 흰 눈과 서리 같아라.

裁爲合歡扇(재위합환선)

합환선(合歡扇)을 만들고자 잘라 낸 비단은

團圓似明月(단원사명월)

둥글고 밝은 명월과 같도다.

出入君懷袖(출입군희수)

님의 옷 속 드나드는 부처가 되어

動搖微風發(동요미풍발)

지금은 산들바람4) 일으키지만

常恐秋節至(상공추절지)

항상 앞서는 걱정은 가을철이 돌아와

涼飇奪炎熱(량표탈염열)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뺏어 가면

棄捐篋筍中(기연협순중)

대바구니 속으로 버려져서

恩情中道絶(은정중도절)

내 님의 사랑도 끊어질까봐서다.

이 시의 작자 반첩여(班婕妤)의 이름은 반염(班恬)이다. 반황(班況)의 딸이며, 반표(班彪)의 고모이고, 반고(班固), 반초(班超), 반소(班昭)의 고모할머니이다. 반염은 전한의 한성제(漢成帝 : 재위 전32-7년) ) 때 궁녀로 입궁하여 소사(少使)에 머물다가 총애를 받아 곧바로 첩여(婕妤)에 책봉되었다. 한성제 때의 비빈들의 품계는 황후를 제외한 11단계가 있었는데 소사는 가장 낮은 11등급의 궁인이고 첩여는 소의(昭儀) 다음의 2 번째 품계다. 상경과 열후와 같은 작록을 받았다.

한나라 황제가 궁원을 돌아다닐 때는 항상 능라로 만든 장막을 쳐호화롭게 장식하고 안에는 비단 요를 깐 연(輦)을 타고 다녔다. 그리고 수레 앞에는 두 사람이 뛰면서 수레를 인도했다. 그래서 황후나 비빈이 수레를 탈 때는 한 사람이 끄는 수레에 태워 뒤 따르게 했다. 한성제가 비빈을 동승시키고 나들이를 할 때는 겨우 한 사람만을 태울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잠시라도 반첩여와는 떨어지고 싶지 않은 한성제는 특별히 명을 내려 기존의 것보다 큰 수레를 제작하여 반첩여와 동승하여 나들이를 가려고 했다. 그러자 첩여는 한성제의 명을 받들지 않고 말했다.

“ 옛날부터 전해오는 그림이나 서적을 보면 성군(聖君)의 경우 모두가 명신을 측근에 두었고 하상주(夏商周)의 마지막 임금들인 걸왕(桀王), 주왕(紂王), 그리고 주유왕(周幽王) 등은 총애하는 비빈들을 곁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나라를 망치고 자신의 몸은 죽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폐하의 함께 수레를 타고 출입을 한다면 그들의 전철을 밟게 되는데 어찌 태연히 그런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반첩여의 말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 한성제는 새로 제작한 수레를 타고 나들이를 나가려는 생각을 접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태후가 듣고 매우 기뻐하며 좌우의 측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옛날에는 번희(樊姬)가 있고 지금은 첩여가 있도다.”

번희는 춘추 때 초장왕의 부인으로 내조를 잘해 초장왕이 패자로 오르는데 역할을 많이 했다. 왕태후는 그런 번희에 비유하여 반첩여를 극찬했다.

그녀는 성제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죽고 말았다. 그러고 세월이 흘러 미색이 쇠퇴하자 젊고 아름다운 조비연(趙飛燕) 자매가 후비로 입궁하면서 점점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조비연 자매는 그녀와 허황후(許皇后)를 제거하기 위해 성제에게 허씨와 반씨가 후궁들과 성제를 저주하고 있다고 무고하였고 이 때문에 허황후는 폐위된 후에 유폐되어 갇혔고 조비연도 황제의 심문을 받았다. 그러자 첩여는 추호도 흔들리지 않은 태연한 자세로 한성제에게 말했다.

“ 첩은 듣기에 사람의 생사는 운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이 내려준다고 했습니다. 올바르게 몸을 닦았음에도 아직 복을 얻지 못했는데 어찌 간사한 마음으로 그런 것들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귀신이 그런 것들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참소하는 도리를 믿겠으며, 만일 귀신이 알고 있지 못한다면 참소하는 말로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첩은 감히 그런 행위를 할 수도 없고 또한 그런 일을 할만큼 불초하지도 않습니다. ”

즉 첩여의 말은 ‘ 수명의 길고 짧음은 운명에 달려 있고 부귀는 하늘이 정해주기 때문에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바른 몸가짐으로 살아왔음에도 아직까지 복을 얻을 수 없었는데 간사한 마음으로 어찌 복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귀신이 그런 것들을 알 수 있다면 어찌 간사한 기도를 들어줄 수 있겠으며, 또한 만약 귀신들이 그런 것들을 모른다면 저주를 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나는 감히 그런 일을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짓을 할만큼 불초한 사람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한성제는 반첩여의 해명에 수긍하고 또한 예전의 오랫동안 쌓은 정리가 생각이 나서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오히려 후한 상을 내리고 그 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부끄러운 마음을 씻었다.

혐의는 풀렸지만 반첩여의 신세는 그 옛날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때와 같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모함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한 반첩여는 자신을 총애하던 왕정군 태후를 모신다는 이유로 궁을 나가 장신궁(長信宮)으로 떠나버렸다. 반첩여는 장신궁에 머물며 자도부(自悼賦), 도소부(搗素賦), 원가행(怨歌行)등 세 편의 시를 지었는데 그 중에 원가행만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후에 한성제가 붕어하자 곁에서 모시던 조비연의 동생 조합덕(趙合德)은 죄를 추궁당할까 두려워 자살했다. 성제의 죽음으로 황제의 자리는 부(傅)태후의 손자인 한애제(漢哀帝) 유흔(劉欣)에게 돌아갔다. 장안성으로 다시 돌아온 부태후는 처음엔 겸손했지만 새 황제의 권력을 내세워 점점 본색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황태태후가 된 부태후는 태황태후 왕정군(王政君)을 무시하고 그 일가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권력투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서로 간의 싸움으로 입은 피해가 너무 심했기에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해 서로를 견제하는 쪽으로 머물게 되었다. 부태후는 평소에 왕정군을 힘없는 늙은이라고 생각해서 노골적으로 괄시를 했으며 힘 있는 자에게 약한 왕정군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부태후도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손자인 황제였다. 한애제는 자신의 몸종이었던 미남자 동현(董賢)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에 부태후는 불같이 반발했고 한애제 또한 할머니 밑에서 간섭당하며 살던 시절에 염증을 느끼고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한애제는 동현을 대사마의 장군에 올리고 또한 그의 일가에 파격적인 벼슬을 내렸다.

황궁에 할머니와 손자간의 싸움은 서로를 중병에 걸리게 만들었고 먼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태후를 뒤따라 한애제도 죽고 말았다. 이때 왕정군은 황제의 옥쇄를 움켜쥐고 급히 왕망(王莽)을 불러 대사마의 직위에 올리고 중산왕의 아들 유영(劉嬰)을 새 황제에 올리고 죽은 부태후와 그때까지 살아있던 황태후 조비연, 동현의 세력을 일순간에 숙청했다. 아둔했던 왕정군이 그렇게 비상한 책략을 구사한 것은 바로 장신궁에서 왕정군을 곁에 모시던 반첩여였다.

한성제가 아끼던 조비연은 황태후, 황후, 서민으로 신분으로 추락하다 결국 강요에 못 이겨 자살했으나 반첩여는 홀로 한성제의 능묘를 지키며 그를 추억하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 최후에 웃는 자는 바로 그녀였다. 비록 황제의 사랑은 오래 받진 못했으나 후대의 많은 시인과 문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여류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후에도 그녀의 일가 반씨들의 가세는 크게 흥성하여 후한말까지 한나라의 정치판에 참여해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 예로 화희황후 등씨의 스승이었던 여학자 반소를 들을 수 있다. 다음은 당나라 때의 대시인 이태백이 반첩여를 노래한 원가행이라는 시다.

다음은 이백이 반첩여의 처지를 동정하는 심정으로 지은 같은 제목의 시다.

十五入漢宮(십오입한궁)

열다섯 살에 한나라 궁궐에 들어와서

花顔笑春紅(화안소춘홍)

꽃 같은 얼굴로 봄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君王選玉色(군왕선옥색)

고운 얼굴로 임금님께 뽑혀서

侍寢金屛中(시침금병중)

황금색 병풍 아래에서 잠자리를 모시며

薦枕嬌夕月(천침교석월)

베개를 밀치고 저녁달을 보고 애교부리니

卷衣戀春風(권의련춘풍)

옷 걷고 봄바람을 그리워했었다.

寧知趙飛燕(녕지조비연)

어찌 알았겠는가? 조비연이란 여인에게

奪寵恨無窮(탈총한무궁)

임금님 총애를 빼앗긴 한을 품게 될 줄을

沉憂能傷人(침우능상인)

깊은 시름은 사람의 마음 상하게 하니

綠鬢成霜蓬(녹빈성상봉)

검푸른 귀밑머리 서리 맞은 쑥처럼 되었다.

一朝不得意(일조부득의)

하루아침에 마음을 빼앗겼으니

世事徒爲空(세사도위공)

세상사란 헛되고 부질없기만 했다.

鷫鸘換美酒(숙상환미주)

숙상 갖옷 팔아서 맛있는 술과 바꾸니

舞衣罷雕龍(무의파조룡)

무용복의 용무늬 다 지워졌다.

寒苦不忍言(한고부인언)

춥고 괴로운 신세 차마 말로 못해

爲君奏絲桐(위군주사동)

임금 위해 오동나무 거문고 연주하다가

腸斷弦亦絶(장단현역절)

애간장 끊어지고 악기 줄도 끊어지니

悲心夜忡忡(비심야충충)

시름겨운 밤에 마음은 서글프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