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登樓賦(등루부)
- 성루에 올라 -
왕찬(王粲)
등루부는 왕찬이 형주(荊州)의 당양현(當陽縣)에 의 성루에 올라 가슴 속의 뜻을 펴지 못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가을의 정취에 기탁하여 지은 작품이다. 당양현은 지금의 호북성 의창현(宜昌縣)이다. 한헌제(漢獻帝) 초평(初平) 4년은 서기 193년이다. 이 해에 17살의 왕찬은 장안의 난리를 피해 형주로 들어가서 유표(劉表)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용모가 초라하고 신체가 허약한 왕찬을 본 유표는 중용하지 않고 한직에 머물게 했다. 건안 11년 서기 206년, 형주에 기거한 지 어느덧 10년이 넘어 13년 째에 접어들어 나이가 이미 30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형주에서 불우한 날을 보내고 있던 중 있었던 왕찬은 그해 가을 당양현의 성루에 올라 이 작품을 지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불안정한 시국, 오랫동안의 타향살이에 대한 고통과 향수,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싶으나 길이 열리지 않고 자신이 재주를 가지고 있음에도 기회를 만나지 못한 울분 등을 표현했다.
登玆樓以四望兮(등자루이사망혜)①
이 누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聊睱日銷憂(요가일소우)②
잠시 한가한 마음이 되어 속세의 걱정이 사라진다.
覽斯宇之所處兮(람사우지소처혜)③
이 누각의 주변 경관은
實顯蔽而寡仇(실현폐이과구)④
참으로 사방이 활짝 트이고 넓어 견줄 수 있는 곳이 없다.
挾淸漳之通浦兮(협청장지통포혜)⑤
맑은 장수(漳水)가 저수(沮水)와 합류하는 포구가 보이고
倚曲沮之長洲(의곡저지장주)⑥
크게 꺾인 흐르는 저수 가운데에 기다란 섬이 하나 누워있다.
背墳洐之廣陸兮(배분연지광륙혜)⑦
북쪽으로는 넓디 넓은 평야가 펼처져 있고
臨皐隰之沃流(임고습지옥류)⑧
남쪽으로는 농경지를 기름지게 하는 하천이 흐르고 있다.
北彌陶牧(북미도목)⑨
또 북쪽 넘어 땅은 도주공(陶朱公)의 고향과 닿아있고
西接昭丘(서접소구)⑩
서쪽은 초나라(楚)의 소왕(昭王) 능묘에 가깝다.
華實蔽野(화실폐야)
꽃과 열매들이 들녘을 덮었고
黍稷盈疇(서직영주)⑪
밭 두둑에는 곡식이 익어간다
雖信美而非吾土兮(수신미이비오토혜)
이 고장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고향이 아니니
曾何足以少留(증하족이소류).
결국 잠시 머무른 것으로 만족해야 않겠는가?
遭粉濁而遷逝兮( 조분탁이천서혜)
난세를 만나 여기저기 옮겨가며
漫踰起以迄今(만유기이흘금)
오랜 12년 세월을 덧없이 보냈지만
情眷眷而懷歸兮(정권권이회귀혜)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그리우니
孰憂思之可任(수우사지가임)
누군들 이 우수를 참을 수 있겠는가.
憑軒欖以遙望兮(빙헌람이요망혜)
난간에 몸을 기대고 저 멀리를 바라보며
向北風而以開襟(향북풍이이개금)
앞섶을 활짝 열고 불어오는 북풍을 온몸에 받아 넣으며
平原遠而極目兮(평원원이극목혜)
멀리 보이는 평원 저 끝에는
蔽荊山之高岑(패형산지고잠)형산(荊山)의 높은 산봉우리가 가로막고
路逶迤而脩廻兮(노변이이수희혜)
길은 굽이굽이 끝없이 이어지고
川旣漾而濟深(천기양이제심)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건너기엔 깊다.
悲舊鄕之壅隔兮(비구향지옹격혜)
멀리 고향을 떠나온 슬픔에
悌橫墜而弗禁(제횡추이불금)
눈물은 한없이 흘러 멈출 길이 없다.
昔尼父之在陳兮(석니부지재진혜)
그 옛날 공자님이 진나라에 계실 때⑫
有歸歟之歎音(유귀서지탄음)
돌아가겠다고 탄식하였고
鍾儀幽而楚奏兮(종의유이초주혜)
진(晉)의 포로가 된 종의(鍾儀)는 고국인
초(楚)의 음악을 연주했고⑬
莊寫顯而越吟(장사현이월음)
초에서 출세한 장사(莊寫)는
고국 월(越)나라 노래를 흥얼거렸다.⑭
人情同於懷土兮(인정동어회토혜)
사람이라면 누구도 고향생각은 마찬가지
豈窮達而異心(기궁달이이심)
궁하거나 영달하거나 그 정은 변함이 없다.
惟日月之逾邁兮(유일월지유매혜)
세월은 덧없이 흘러만 가지만
俟河淸其未極(의하청기미극)
황하는 좀처럼 맑아질 줄 모른다.
冀王道之一平兮(기왕도지일평혜)
희망컨대 왕도가 이루어져 나라에 평화가 찾아오면
假高衢以騁力(가고구이빙력)
그때를 만나 나의 재능과 포부를 맘껏 발휘하리라!
懼匏瓜之徒懸兮(구포과지도현혜)
수세미는 길게 달려있지만 먹을 수 없고⑮
畏井渫之莫食(외정설지막식)
우물은 깨끗하게 깊어도 마시지 못할 것을 걱정한다.⑯
步棲遲以徙倚兮(보서지이도의혜)
루상에 걸쳐 앉아 이리저리 생각에 잠겨있노라니
白日忽其將匿(백일홀기장익)
해는 어느 틈에 서산에 기울고
風蕭瑟而並興兮(풍소슬이병흥혜)
바람은 쓸쓸히 사방에서 불어오더니
天慘慘而無色(천참참이무색)
하늘은 처참하게 어둑해졌다.
獸狂顧以求兮羣兮(수광고이구혜군혜)
짐승들은 바삐 사방을 살피며 그들의 무리를 찾고
鳥相鳴而擧翼(조상명이거익)
새들은 서로들 지저귀며 나래짓한다
原野闃其無人兮(원야격기무인혜)
넓은 들은 쓸쓸히 인기척 없고
征夫行而未息(정부행이미식)
길손만이 오직 바삐 갈 길을 재촉한다.
心悽愴以感發兮(심처창이감발혜)
마음은 그저 외로이 슬퍼지며 감상적이 되고
意忉怚而憯惻(의도저이참측)
가슴을 짓누르며 우수에 젖게 한다.
循堦除而下降兮(순계제이하강혜)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니
氣交憤於胸臆(기교분어흉억)
상기된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다.
夜參半而不寐兮(야참반이불매혜)
야반이 되도록 잠 못 이르며
悵盤桓以反側(장반환이반측).
마음의 평온을 못 찾고 그저 뒤척일 뿐이다.
①자루(玆樓)의 자(茲)는 (此)와 통한다. 즉 자루는 맥성(麥城)의 성루로 지금의 호북성 당양(當陽) 동남의 장수(漳水)와 저수(沮水)가 합류되는 곳에 있다.
②료(聊)는 ：고차(姑且) 혹은 잠차(暫且) 즉 잠시라는 뜻이고 하(暇)는 가(假)와 통한다. 소우(銷憂)는 걱정되는 일을 해소한다는 뜻이다.
③斯宇之所處(사우지소처)：누각이 있는 곳의 주변 환경
④實顯敞而寡仇(실현창이과구)：넓고 확트인 경관으로 이 누각과 필적할 만한 건물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과(寡)는 소(少)이고 구(仇)는 필적(匹敵)이다.
⑤挾清漳之通浦(협청장지통포)：장수(漳水)와 저수(沮水)가 합쳐지는 포구. 협(挾)은 대(帶)다. 청장(清障)은 장수(漳水)로 호북성 남장(南漳)에서 발원하여 당양(當陽)을 지나 저수(沮水)와 합류하여 강릉(江陵)을 경유하여 장강(長江)으로 흘러들어간다. 통포(通浦)는 두 개의 강물이 서로 합류하는 포구다.
⑥倚曲沮之長洲(의곡저지장주)：장주(長洲)는 저수의 만곡부 중간에 기다란 모습의 섬이다. 의(倚)는 고(靠)로 의지한다는 뜻이다. 곡저(曲沮)는 저수의 만곡부(彎曲部)다. 저수는 호북성 보강(保康)에서 발원하여 남장(南漳)을 경유한 후에 당양(當陽)에서 장수(漳水)와 합류한다.
⑦背墳衍之廣陸(배분연지광륙)：누각의 북쪽 지세는 높은 곳으로 광활하고 아득한 평원이 펼쳐져 있다. 배(背)는 고(靠)로 북쪽을 지칭하고 분(墳)은 고(高)이며 연(衍)은 평(平)이다. 광륙(廣陸)은 광무(廣袤)로 동서남북으로 확 트인 평야를 말한다. 광(廣)은 가로로 무(袤)는 세로로 넓다는 뜻이다.
⑧臨皋隰之沃流(임고습지옥류)：누각의 남쪽 지세는 푹 파인 저습지다. 임(臨)은 면림(面臨)으로 남쪽 방향을 가리킨다. 고습(皋隰)은 강가 옆의 저습지이고 옥류(沃流)는 전답에 관개를 할 수 있는 강물을 뜻한다.
⑨北彌陶牧(북미도목)：미(彌)는 접(接)이다. 즉 북쪽으로는 도주공(陶朱公)이 살았던 강릉(江陵)과 접해있다는 뜻이다. 도목(陶牧)은 춘추 때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관직을 버리고 도 땅으로 가서 장사를 하여 거만금을 모았던 도주공 범려를 말한다. 목(牧)은 교외다. 호북성 강릉시 서쪽에 도주공의 묘가 있었기 때문에 도목이라고 했다.
⑩소구(昭邱)：초소왕(楚昭王)의 분묘로 당양의 교외에 있다. 초소왕의 성은 미(羋)이고 이름은 웅진(熊珍)이다. 초평왕(楚平王)의 아들이다. 재위 시 오나라와의 빈번히 발생한 전쟁에서 계속 패전을 당하다가 기원전 506년 당(唐)과 채(蔡) 두 나라와 연합군을 결성한 오왕 합려(闔閭)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아 초나라의 수도 영도(郢都)가 함락당하고 초소왕은 수(隨)나라로 달아나 몸을 의탁했다. 그 다음 해에 신포서(申包舒)가 진(秦)나라에 사자로 가서 얻은 진나라 구원군의 도움으로 오군을 물리치고 영도를 탈환했다. 멸망의 위기에서 천우신조로 나라를 다시 찾은 초소왕은 국정을 쇄신하여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기원전 489년, 오왕 부차가 초나라의 동맹국인 진(陳)나라를 침략하자 구원군을 이끌고 친히 원정에 나섰다가 행군도중 군중에서 죽었다.
⑪黍稷盈疇(서직영주)：서직(黍稷)은 농작물 지칭하는 말이고 영주(盈疇)은 들판에 온갖 농작물로 뒤 덮인 모습을 말한다.
⑫昔尼父之在陳兮 : 공자가 제자들을 이끌고 천하를 주유하여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유세할 때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양식이 떨어지는 곤경에 처하자 제자들을 향해 “돌아가자, 돌아가자!”라고 외쳤다. 니보(尼父)는 공자를 가리키고 출전은 《논어·공야장(公冶長)》이다. 공자가 처한 상황을 왕찬은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여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나타냈다.
⑬ 鍾儀幽而楚奏兮：종의(鍾儀)는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이다. 진(晉)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 군중에 감금되었다. 군중을 순시하던 당시 진나라 군주인 경공(景公)이 창고에 갇힌 남방의 모자를 쓴 종의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시종이 종의는 초나라 포로인데 악사(樂師)라고 고했다. 경공이 종의에게 거문고를 내주며 노래 한곡을 연주하라고 명하자 그는 초나라의 노래를 연주하여 조국 초나라를 잊니 못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유(幽)’는 포로로 잡혀 깊은 곳에 갇혀 있는 상황을 말하고 ‘초주(楚奏)’는 ‘초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다.’이다.
⑭ 莊舄顯而越吟：장석은 춘추시대 때 월나라의 평민출으로 초나라로 들어가 높은 관직을 지냈다. 한번은 그가 병이 들자 초왕이 신하들에게 “장석은 월나라에서 빈궁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초나라에서 고귀한 신분이 되었다. 지금도 그가 월나라를 그리워하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시종을 시켜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시종이 돌아와 장석은 병상에서도 월나라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음을 고했다. 장석은 부귀한 중에도 조국 월나라를 잊지 않고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⑮ 懼匏瓜之徒懸：포과(匏瓜)는 조롱박으로 호로(葫蘆)의 일종이다. 《논어(論語)·양화(陽貨)》편에서 공자가 “내가 어찌 조롱박이겠는가? 어찌 달려만 있고 먹을 수 없는 조롱박이겠는가?[吾豈匏瓜也哉？焉能系而不食？]” 라고 한 말을 왕찬이 스스로 쓸모없이 달려만 있고 내증을 펼 수 있는 기회가 없음을 비유해서 한탄한 말이다. ‘도현(徒懸)’은 쓸모없이 달려만 있는 상태를 말한다.
⑯ 畏井渫之莫食：‘정설(井渫)’은 깊은 우물을 청소하여 맑게 해서 마실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행위다. 우물물을 맑게 만들었지만 아무도 마시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했다.《주역(周易)·정괘(井卦)》에 “우물물을 맑게 했지만 마시지 않으니, 내 마음을 슬프게 한다.[井渫不食，爲我心惻]” 왕찬 자신은 몸을 정결하고 보중하고 있지만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비유했다.
《등루부(登樓賦)》는 왕찬이 형주(荊州) 당양현(當陽縣)에 있는 성루에 올라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함을 가을의 정취에 기탁하여 지은 작품이다. 한헌제(漢獻帝) 초평(初平) 4년은 서기 193년으로 왕찬의 나이 17세 되던 해다. 이 해에 장안에서 일어난 난리를 피해 형주로 피난와서 유표(劉表)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유표는 용모가 초라하고 신체가 허약한 왕찬을 보고 중용하지 않았다. 건안 11년 서기 206년 왕찬의 나이가 이미 30세가 넘었지만 형주에서 여전히 우울하게 보내고 있다가 당양현의 성루에 올라 이 작품을 지어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고 멀리 떠난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이 작품을 지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불안정한 시국, 고향을 떠나와 겪고 있는 향수로 인한 마음의 고통,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싶으나 길은 열지지 않고 자신이 재주를 가지고 있음에도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울분 등을 토로했다.
《등루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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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31 13: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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